학교 밖에서 크는 아이들

홈스쿨기사



학교 밖에서 크는 아이들

네아이아빠 0 1,776 2012.06.24 01:24
고려대 A교수는 1남3녀를 홈스쿨링(home schooling·가정학습)으로 공부시키고 있다. 일반 학교로 치면 큰딸은 고1, 둘째 딸은 중2, 외아들은 초등학교 4, 막내딸은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닐 나이다. 그러나 모두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A교수와 의사인 부인은 늦게 만나 결혼해 아이들을 낳았다. 맞벌이인지라 육아·집안일에 가사도우미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었다. 큰애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구구단을 몰라 학급에서 열등생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반에서 제일 늦게까지 못 외워 벌로 청소를 하고 왔다며 울었다.

 이건 선행학습을 반드시 하라는 강제 아닌가. 딸에게도 문제가 있겠지만 교육 과정과 교수 방법에 큰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해결책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안학교라면 몰라도 홈스쿨링은 너무 급진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딸이 초등학교 4학년 때 결국 결단을 내렸다. 자식들이 올바른 품성을 갖추고 남 배려하며 살도록 이끌어주고 싶었다. 집에서 인성을 아무리 잘 가르쳐도 학교에 가면 망가져버리기 십상이라는 우려도 작용했다. 함께 고민하던 부인이 병원 일을 그만두겠다고 자청했다. 나머지 아이들도 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하나도 아니고 무려 넷. 벌써 6년째 부인이 집에서 자녀 교육과 생활지도를 도맡고 있다. 주변의 홈스쿨링 가정과 연계해 서로 돕는다. A교수는 작년에 딸과 또래 홈스쿨링 학생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36회분 세계사 강의를 영어로 진행했다. 일종의 품앗이였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현행법 아래서 A교수 부부는 나름의 교육철학과 자식에 대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자칫 범법자로 몰릴 가능성이 크다. 초·중등교육법은 의무교육(초·중학교) 기간에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취학 의무 위반으로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도록 규정하고 있다(다행히 과태료를 부과 받은 부모는 이제까지 한 명도 없다). 다만 학교에서 ‘교육감이 정하는 질병 기타 부득이한 사유’를 인정해줄 경우 일정 기간이 지나 ‘정원 외 관리대상’으로 분류돼 검정고시 응시 자격이 주어지는 편법이 있기는 하다. 현재 비인가 대안학교나 홈스쿨링 학생들은 이런 편법에 기대고 있다.

 우리나라의 홈스쿨링에 대한 정밀한 실태조사는 아직 이루어진 게 없다. 홈스쿨링 동기나 모양새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집계한 학업 중단율을 참고해보자.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비율은 2010년 기준으로 초등학교 1만8836명, 중학교 1만8866명, 고등학교 3만8887명이다. 매년 각각 2만 명 가까운 아이들이 초등학교·중학교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학교부적응·질병·종교에서 부모의 교육철학에 이르기까지 이유야 많겠지만 대안학교나 홈스쿨링 수요가 점점 느는 것만은 틀림없다. 지금과 같은 법적 사각지대 내지 회색지대에 이들을 방치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물론 문제가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교육이란 과연 무엇인가, 공교육·의무교육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교육받을 권리와 의무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등 까다로운 질문들이 여기에 담겨 있다. 제도권에 되레 영향을 끼칠 정도로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던 대안학교들 중에서도 요즘 입시명문·귀족학교 소리를 듣는 곳이 등장하면서 ‘무엇을 위한 대안이었나’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홈스쿨링을 아무런 통제장치 없이 부모의 자질에만 맡긴다면 자녀 방치·학대로 이어지는 극단적인 사례도 상상해볼 수 있다. 외국도 홈스쿨링 정책은 천차만별이다. 독일·중국처럼 불법인 곳부터 영국처럼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하는 곳까지 제각각이다. 스웨덴은 면허를 따야 홈스쿨링을 할 수 있도록 법으로 정했다. 반면 핀란드는 부모의 신고로 홈스쿨링이 가능하고, 지자체에서는 수업 진행 상황을 모니터한다. 이 때문에 얼마 전 홈스쿨링을 원하는 스웨덴의 12가족이 자국의 제도에 반발해 핀란드로 집단 이주해버려 큰 화젯거리가 됐다.

 대안학교는 물론 홈스쿨링도 공교육의 대체재 아닌 보완재로 인식할 때가 된 것 같다. 국회에서는 김춘진(민주통합당) 의원이 가장 적극적이다. 18대 국회에서 공청회를 거쳐 ‘대안교육기관 등의 지원에 관한 법률안’과 ‘초·중등 교육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낸 데 이어 이번 국회 들어와서도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29일 국회에서 김 의원이 주관하는 전문가 간담회가 열리고, 다음달 공청회도 예정돼 있다. 법안에 관해 여러 가지 요구가 있겠지만 딱 하나만 최우선으로 요청하고 싶다. 제발 ‘불법’ 딱지만이라도 벗겨달라는 것이다. A교수가 그렇듯 아이가 바르게 살게 해주려고 부모가 직접 나선 것인데 처음부터 위법 상태에 빠뜨리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노재현 기자 jaik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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