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3:20).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의 문제를 토론하는 가운데에서 한 아버지가 언젠가 다음과 같은 말로 그 일의 가능성을 질문한 적이 있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를 당신에게 순종하도록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나의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아요. 그들은 당신의 아이들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에게는 순종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요."
성경의 어느 부분도 순종과 바른 태도들이 아이의 자연적인 반응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차라리 불순종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나 반항하는 것 혹은 성내는 것은 훈련시킬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그들의 성격이 어떠하든지 부모는 자녀에게 순종하는 법은 가르쳐야 한다.
각각의 아이들은 하나님의 독특한 피조물이다. 각각의 아이들은 자기 나름의 신체적 형태, 성격, 취향 그리고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에 따라서 이런 영역들의 아무리 서로 다르더라도 각각의 아이들은 순종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나의 아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매우 활동적인 아이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가끔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있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그에게 순종을 가르쳐 준 결과 그는 자기 제어라는 면에서 도움을 받게 되었다. 우리 딸은 휠씬 조용하고 내성적이지만 고집이 매우 세었다. 우리가 딸아이에게 우리에게 오라고 요구하거나 무엇을 만지지 말라고 이야기하면, 딸아이는 가끔 버티고 서서 우리를 응시하면서 순종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딸에게 순종을 훈련시킨 결과 딸아이의 완고함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이 두 아이들은 어떤 영역에서는 더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하였지만, 순종의 문제는 둘 모두에게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어떤 기질이나 성격의 이유로 자녀의 순종에 대한 그의 명령을 유보해 주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 영역에 대하여 이렇게도 큰 중요성을 부여하셨기 대문에, 자녀의 고집스러운 불순종은 체벌에 의한 사랑의 교정을 필요로 하는 중요한 영역인 것이다.
고집스러운 불순종을 인식함에 있어서 부모는 자녀가 할 수 있는 것과 자녀가 하지 않으려는 것 사이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약 두 살짜리 아이에게 진공청소기로 소제하는 일을 시켰는데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고의적인 불순종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나이가 너무 어리므로 신체적인 능력도 없고 이해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두 살짜리에게 "이리 온"이라고 말했을 때, 부모를 무시하고 반대 반향으로 가면서 오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고의적인 불순종이다. 이 때에 부모는 그 아이가 "이리로" 올 수가 있으면서도 오려고 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성경은 순종이 완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 명령은 부모가 자녀를 악의 영역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는 자기들이 순종하고 싶은 마름이 생길 때만 부모에게 순종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부모의 권위에 승복하며 모든 영역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기를 원하신다. 자녀의 부분적인 순종은 받아들여질 수 엇는 것이며 징계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매우 어린 아이들에게는 한번에 한 가지 혹은 두 가지의 간단한 명령만 주어져야 한다. "네 방을 깨끗이 치워라."고 말하는 대신에 한 어머니는 아장아장 걷은 그녀의 아이에게 "장난감 다섯 개를 장난감 상자에 집어넣으렴."이라고 말한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지면 그녀는 "이제 다섯 개 더 집어넣으렴."이라고 말한다. (이 때에 그 아이는 셈을 세는 경험을 동시에 하게 된다!)
만약 더 나이가 든 아이에게 쓰레기를 치우고 집 앞을 쓸라고 시켰는데 첫번째 일만 하고 말았다면, 이것은 완전한 순종이 아니다. 만약 자녀에게 집 주위의 어떤 일이 맡겨졌다면, 그는 맡겨진 일을 완전히 끝마친 이루에야 비로소 (이 때에 그 일을 하는 데에 사용된 연장을 치우는 일까지 완료해야 한다.) 다른 일에 착수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완전한 순종의 중요성은 사울 왕의 부분적인 순종의 이야기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 족속을 도말하되 그들의 가축까지도 완전히 죽여버릴 거을 명하셨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사울이 사무엘을 만났을 때에 사무엘은 그에게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완전히 순종했는지를 물었다. 사울은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사무엘의 귀에는 양의 울음 소리가 들였다. 이 울음 소리에 대하여 사무엘이 묻자 사울은 자기가 그것들을 뒤에 남겨둔 것은 그것들을 ㅎ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고자 함이었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불순종을 정당화하였다. 그러자 사무엘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 부분적인 순종의 결과로 사울 왕은 그의 왕국을 몰수당했던 것이다.(사무엘상 15장을 보라.)
순종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즉각적인 행동이라는 측면이다. "지연된 순종은 불순종이다. "라는 고전적인 훈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실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정상적인 목소리로 어떤 일을 한번 요구했을 때, 자녀는 단 한번의 이야기만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에게 즉각적인 순종을 훈련시켜야 하는 중요성에 대하여 의심을 품을 수 있다. 즉각적인 순종의 중심 원리는 자녀로 하여금 부모의 말 - 그것이 "안돼"라는 말이든, 혹은 "너의 장난감을 치워라."라는 구체적인 명령이든 - 을 따르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자녀가 어렸을 때에 간단한 명령을 따르는 법을 배우면, 그들이 더 성장한 후에 더 중요한 영역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이 준비될 것이다. 만약 부모가 자녀에게 "이제 포테이토 칩을 충분히 먹었으니까 더 이상 먹지 말아라."고 말했는데, 3분 후에 그 아이가 다시 가서 한 웅큼의 포테이토 칩을 꺼냈다면 그것은 불순종이다.
부모는 또한 계속적으로 경고를 말한후 , 혹은 화가 치밀어 오른 이후에야 비로소 행동을 취하는 잘못에 빠질 수가 있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이 농담이 아니며, 단 한번 이야기했을 때 자녀가 거기에 따를 것을 부모는 기대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도 많은 아이들이 부모가 네 번이나 다섯 번을 이야기하거나 혹은 화가 나서 겁을 줄 때까지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아이들이 그런 식으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어떤 점에 도달했을 때 그들의 말을 실행할 것인가를 신속히 배운다.
한 어머니가 언젠가 그녀 자신의 딸을 복종시키려다가 얼마나 좌절을 겪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녀는 자기가 묻고 묻고 또 물었지만 응답이 없었다고 말했다. 마침내 절망적인 분노 속에서 그녀는 "지금 당장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혼내줄테야."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와 함께 이 문제를 더 토론하는 가운데에서 그 어머니는 왜 그녀는 그런 상태에 이르러야만이 딸로부터 적극적인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즉 그녀는 "안 그러면 혼내줄테야."라는 말을 듣고서야 딸이 말을 듣도록 딸을 훈련시켜 왔던 것이다. 그 소녀는 그것이 신호이며, 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진심을 가리켜 보여주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자녀와 부모 모두에게 정당하고도 가장 쉬운 길은 첫마디 말에 순종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이런 훈련의 결과로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고요하고도 평화스러운 가정이 마련되는 것이다.
지연된 순종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요나의 생애 속에서 나타난다. 결국에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라고 명하신 곳인 니느웨로 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순종을 지연시킨 댓가로 그의 생명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 큰 위험에 빠지고 말았다(요나1장과 2장을 보라). 즉각적이며 철저한 헌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또한 자녀의 전적인 복지를 위해서 극히 중요한 것이다. 혼잡한 차도로 뛰어들어가려는 아이를 부르는 부모는 그 아이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적이고도 즉각적인 순종을 기대하는 것이다.
설사 다른 어른이 자녀에게 부모와 다른 어떤 것을 이야기하더라도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따르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어느 날 나의 아내와 두 살짜리 딸아이가 친구의 집에 가 있었다. 그 때에 우리 딸이 커피 테이블로 가서는 거기에 단정히 쌓여져 있는 잡지책들을 빼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나의 아내는 "안돼. 잡지를 만지면 안된다."라고 이야기했다.
이 말을 듣고 우리 딸이 어쩔 것인지를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 우리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가지고 놀게 하세요."
그러자 나의 아내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마와요. 하지만 나는 이미 아이에게 안된다고 이야기했으니 아이가 내 말에 순종하는 것을 원해요." 아이들이 매우 어렸을 때에 당신이 한 말을 준수함으로써 당신의 말의 의미를 혼돈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당신의 말을 지키는 것이 자녀들 앞에서 당신의 권위를 확립시키는 한 가지 방법이 된다.
또한 자녀의 순종은 무조건적인 것이어야 한다. 자녀의 순종은 그 명령이 아이에게 얼마나 건정하게 들리느냐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할 수 있기 위하여 부모의 명령이 합리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순종을 얻어내기 위하여 자녀와 논란을 벌이는 부모는 대개 좌절하거나 허(허)를 드러내고 만다. 그리고 대개 그런 부모들은 자기들이 바라는 반응을 얻기 위하여 뇌물을 사용하는 위치로 떨어지고 만다.
여섯 살짜리 딸에게 점심을 먹이기 위하여 한 어머니가 창문에서 "얘야, 이제 들어와서 점심을 먹어야지?"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싫어요, 엄마, 지금 나는 너무나 신나게 놀고 있는데."라는 대답이 들려 왔다.
"그래도 음식이 얼마나 맛이 있는데 그러니."
"뒤에 먹을래요."
"그래도 지금 먹는 것이 제일 좋지 않겠니?"
"싫어요."
"엄마는 너를 위해서 벌써 점심을 다 준비했단다. 그런데 왜 지금 들어와서 점심을 안먹으려는거지? 만약 지금 들어와서 점심을 먹으면 공원에 데려 가서 한 시간 동안 그네를 태워 주지."
"좋아요, 엄마 곧 들어 갈께요."
어머니는 즉각적인 순종을 원하고 기대한다는 것을 딸에게 단순히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어머니는 아이와의 대화를 통하여 아이를 순종으로 끌어 들이려고 노력한 것이다.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뇌물을 필요로 하는 이런 유형의 접근 방법은, 결국에 가서는 응답을 얻어낼 수 있겠지만 그 응답은 결코 순종이라고 불리울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자녀에게 순종을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다.
손종은 부모의 말에 대한 바른 응답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응답이기도 하다. 거짓말이나 도적질같은 문제도 역시 체벌에 의하여 교정되어야 한다. 이런 방법을 통하야 부모는 자녀들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강화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