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말 대역성경’ 쓴 김현식 美조지메이슨大 연구교수80년 7만 리. 김현식(81)
미국 조지메이슨대 연구교수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난 9월 발간한 자서전 제목과 동일한 이 말은 북한 평양부터 러시아, 한국을 거쳐
미국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측정한 값이다. 기구한 삶이었다. 평양 말투가 그대로 남은 노교수는 아직도 당시 상황이 눈에 선한 듯했다. 6·25전쟁을 말할 땐
머리숱을 헤쳐 포탄 파편을 맞은 상처를 보여줬고, 북녘 고향에 대한 질문에 답할 땐 어린아이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두 번째 자서전 ‘80년 7만 리’와
영어-평양말 대역성경 ‘하나님의 약속 요한’ 출판기념회로 미국에서 방한한 김 교수를 지난 6일 서울의 한
숙소에서 만났다. 북한 김형직사범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한 것, 김일성 부자와의 인연, 러시아에서의 목숨 건 망명, 아내와
결혼한 뒤 뇌출혈로 한쪽 팔다리를 잃은 일,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평양말 성경을 쓴 것…. 그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발걸음을 옮기셨기에 가능했다”고 고백했다.
어머니의 기도그는 북한에서 잘나가는 교육자였다. 북한 최고의 사범대학인 평양사범대학(현 김형직사범대학)을 1954년 졸업하고 38년간 교편을 잡았다. 김일성 처남 자녀의 과외교사였고 김정일에게 러시아어
회화를 가르쳤다. 종신직인 외국어교육연구실장 등을 맡으며 교육계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런 김 교수가 한국 망명길을 택한 계기는 6·25전쟁 때 헤어진 누나 때문이다. 88년부터 러시아 국립사범대 교환교수로 일하던 그는 타국에서 42년 만에 누나를 만났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현 국가정보원)가 마련한 자리에서다. 남북한이 각국의 고급 정보를 수집하려 주요 인물을 포섭하던 시절이었다. 안기부가 망명을 제안하기 1년 전부터 김 교수는 러시아로부터 망명 제의를 받았다. 그는 모든 제안을 물리쳤다. 하지만 혈육을 만나보라는 제안은 뿌리치지 못했다.
미국 시카고에서 온 누나는 만나자마자 김 교수의 어릴 적 별명을 부르며 부둥켜안고 울었다.
“똥똘바우야, 너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하니? 주일학교 최순직 선생처럼 평양신학교 나와 함흥 오로교회 목사가 돼라고 했잖아. 미국이나 서울로 가자. 가서 반드시 목사가 돼야 해. 그래서 북한 사람에게 예수를 전하는 일을 네가 해야 해.”
누나의 말에 그는 아연실색했다. 망명을 재차 거절했다. 그러나 1주일간 설득과 기도를 계속 들으니 그의 심경에 점차 변화가 생겼다. 북한에 교회가 없어진 후 성경말씀이나 찬양을 접하지 못했는데도 누나와 있으니 절로 기억이 났다. 헤어질 땐 기도와 찬양이 이질감 없이 느껴질 정도였다.
누나와 헤어진 후 김 교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튿날 그는 북한 정보 당국으로부터 평양에 즉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누님께서 묵었던 집 주인이 이중 스파이라 1주일간 누나와 나눈 대화를 모두 북한에 보고한 거요. 적의 주선으로 원수의 나라에서 온 누나와 만난 것도 큰 죄지만 하나의 죄가 더 있었습니다. 가계표에 누님을 42년간 올리지 않았어요. 전쟁 때 행방불명된 누님은 그때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 가장 천대받는 게 기독교인지라 누님이 있다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적과 내통한 데다 이력기만죄까지, 바로 그 자리서 총살감이지요. 가족도 수용소에 끌려가 숙청될 게 분명하고….”
한순간에 전도유망한 대학교수에서 죄인이 된 그는 목숨을 건 선택을 해야 했다. 당시 세계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90년 독일이 통일을 이뤘고 91년 소련은 붕괴됐다. 김일성과 친분 깊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루마니아 대통령은 89년 국민에게 총살당했다. 독재 타도가 대세라고 판단한 그는 92년 한국행을 택했다.
사랑의 매김 교수는 바로 한국에 올 수 없었다. 행방불명된 그를 찾느라 혈안이 된 북한과 러시아 정보원의 추격을 따돌려야만 했다. 결국 러시아에서 6개월간 은신하고 변장한 채 화물선 기둥 틈에 숨어서야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누나의 권유대로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왔지만 곧 난관에 부닥쳤다. 언어 문제였다. 북한에선 엘리트였지만 남한에선 3∼5년간 가게
간판조차 해석하기 어려웠다.
“남한에서 사는 게 러시아에서 지내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지요. 쓰레기 종량제 같은 생활용어를 도통 모르니 아주 힘들었습니다.
간판에 ‘
흑염소·생사탕’이라고 씌어 있는 걸
흑염소는 ‘검은
염색을 하는 곳’, 생사탕은 ‘익히지 않은 사탕’이라고 해석할 정도였으니까.”
무엇보다도 남한 교회 적응이 쉽지 않았다. 남한 교회는 그가 어릴 때 봤던 교회와는 달랐다. 간증 차 교회를 몇 차례 방문한 김 교수는 교회가 마치 ‘사업장’ 같다고 느꼈다. 특별헌금 명단을 공개하는 모습에서 ‘교회 역시 회사처럼 돈 위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북 직후 이단단체의 종말론을 믿었던 경험도 교회 적응을 어렵게 했다. 92년 예수가 재림한다는 다미선교회의 주장을 믿었지만 결국엔 거짓말로 드러나자 종교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남한 사회와 교회 적응에 힘겨워하던 김 교수는 아내 김현자(57)씨를 만나면서 안정된 생활을 꾸렸다. 아내는 어머니처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93년 김 교수와
결혼한 김씨는
매일 아침 가정예배를 드렸다. 얼마 후엔 그도 함께했지만 유물론자가 신앙인이 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돌연 뇌출혈로 쓰러졌다. 국가정보대학원과 한국외국어대에 출강하던 김 교수는 하루아침에 중증장애인이 됐다. 결혼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병상에 누워보니 평소엔 알지 못했던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이었다.
“그간 김정일은 안 죽고 우매한 사람만 희생되는 현실이 안타까워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뇌출혈로 쓰러지니 삶의 고비마다 나를 지켜준 하나님의 은정을 깨닫게 됐습니다. 비록 한쪽 손발을 못 쓰게 됐지만요. ‘내가 너희 어머니 기도를 아는데’하면서 사랑의 매를 드신 겁니다.”
악질 서적을 번역하다그가 평양어 성경 제작 필요성을 느낀 건 90년대 초 러시아 파견교수 때의 경험 때문이다. 옆방을 쓰던 한국계 미국인 선교사는 김 교수에게 검은가죽 책을 건넸다.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이를 읽으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과 함께. 호기심에 ‘성경’이란 금박 글자가 새겨진 책을 펼쳤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창세기, 민수기, 신약, 구약…. 생경한 단어가 너무 많았다.
“북한은 한자어와 사투리가 없어요. 오직 문화어(표준어)만 있습니다. 김일성이 사상교육을 위해 한자어와 사투리를 못 쓰게 했지요. 그러다보니 언어학을 공부한 제가 남한 성경을 보고도 내용을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겁니다. 창세기는 ‘창끝의 세기’로, 구약은 ‘오래된 약’으로, 적그리스도는 ‘빨갱이 그리스도’로 오해하기 십상입니다. 저는 그런 식의 선교가 싫었습니다.”
남한에 온 뒤에도 그는 성경이 쉽게 읽히지 않았다. 유월절은 ‘건너뜀 명절’로, 할례는 ‘잘라냄 례식’, 십자가는 ‘십자가 사형틀’로 바꿔야 북한 사람에게 명확히 전달할 수 있을 터였다. 북한 사람도 볼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 김 교수는 평소 생각했던 성경 이야기 3편을 골라 평양말로 고쳤다.
그는 이를 2000년 미국 남침례교 선교사
모임에서 발표했다. 그러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 나왔다. 미국 선교사들은 탄성을 지르며 김 교수에게 평양어 성경을 완성하라고 권했다. 이들은 그가 미국에서 1년간 평양어 성경을 집필할 수 있도록 뉴올리언스 침례신학대학 연구교수로 추천했다.
이러한 지원에 힘입은 김 교수는 성경 인물 25명의 이야기를 엮은 ‘남과 북이 함께 읽는 성경 이야기'를 2003년 펴냈다. 여기에 그는 평양말과
영어 본문을 함께 수록했다. 북한의 영어 배우기 열풍에 비해 영어 교재가 턱없이 적은 것을 감안해서다. 그는 한국과 미국 서점에 쌓인 영어사전을 볼 때마다 손바닥만한 작고 얇은 영어사전조차 없어 손으로 베껴 써야 하는 북한의 제자들이 생각난다고 했다.
“북한에선 성경이 가장 악질 서적입니다.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국민을 무저항주의자로 만들기 위해 선교사를 보낸다고 배우거든요. 북한이 개방돼도 이런 사상 때문에 말씀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이러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성경을 영어 자습용 교재처럼 만든 것이죠.”
종교, 북한 개혁개방의 실마리 될 것북한 교수가 쓴 성경 이야기에 미국인들은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의 행보를 눈여겨보던 예일대는 2003년부터 3년간 그를 신학대 초빙교수로 임용했다. 2007년부터는 조지메이슨대 연구교수로 임용된 그는 하버드대, 듀크대 등 미국 대학 강단을 돌며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강연을 했다.
그가 대표로 있는 평양성경연구소(PBI)도 김 교수 강연 중 조직됐다. 2007년 북한 선교를 주제로 한 콘퍼런스에서 그는 북한의 복음화를 위한 선결과제로 평양성경을 꼽았다. 이에 감동받은 참가자들이 대거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이들을 주축으로 2008년 평양말 성경 제작 기관인 PBI가 세워졌다.
이에 힘입어 김 교수는 영어-평양말 대역성경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그 첫 결과물이 지난달 출간된 ‘하나님의 약속 요한’(홍성사)이다. 이 역시 요한복음의 영어와 평양말 본문이 같이 실렸다.
그렇다면 이 성경은 언제쯤 북한 사람에게 전달될까. 김 교수는 “북한이 개방될 때”라고 답했다.
풍선으로 전달하려고 했지만 불온서적으로 보내고 싶지 않아 포기했다. 그는 북한의 종교자유가 곧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현재 누가복음을 번역 중인 그는 평양말 성경을 공식적인 방법으로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곧 북한 종교 분야가 개방될 거라 봅니다. 종교는 북한 정권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자금이 유입될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제뿐 아니라 종교도 ‘북한식 개방’을 추구하겠지요. 아마
중국 삼자교회처럼 정부가 운영하며 실리를 차리는 방식을 택할 것으로 보입니다.”
김 교수의 목표는 평양말 성경을 90세까지 완성해 북한 교회를 재건하고 예수의 참된 제자를 길러내는 대학을 세우는 것이다. 그는 북한의 복음화를 위해
100세까지 일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것이 그간 하나님 은정에 보답하는 길이라 믿고 있다.
언제 고향이 가장 그립냐는 질문에 김 교수는 왈칵 눈물부터 쏟았다. 6·25전쟁 때 머리에 생긴 상흔을 보이며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순간을 설명하던 때와는 정반대 모습이었다. 흐느끼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김 교수 대신 아내가 답했다.
“60년을 살았는데 얼마나 그립겠어요. 지금도
매일 남한도, 미국도 아닌 북한 꿈을 꾼답니다. 평소에도 머릿속에 북한 달력이 들었는지 국경절 같은 절기를 다 기억하더라고요. 하도 북한을 그리워하니 가끔 제가 묻지요. ‘그래, 꿈속에 저는 있나요?’하고.”
그러자 김 교수가 말하며 아내를 다독였다. “당신이 와 줘서 평양말 성경을 쓸 수 있었지. 우리의 결혼은 하나님의 은정이자 감사요.”
인터뷰 내내 그는 하나님의 은혜란 말 대신 ‘은정’이란 표현을 자주 썼다. 북한에선 수령에게 사용하는 말이다. 7만 리나 걸어왔지만 그에게 북한은 ‘예수 사상을 펼치기 위해 더 가야만 할 길’ 같았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